오랜만에 어이없는 영화를 한편 보았다. 외계에서 온 낙지가 먹물을 뿜어서 의사소통을 한다는 그런 내용이다. 주인공인 여자 언어학자는 낙지들이 사용하는 무시간적인 문자를 결국 해독하여 무시무종한 유니버셜 랭귀지를 체득한다. 그리고 과거 현재 미래 삼세가 결국 여일함을 깨닫고 고통과 기쁨을 담담히 받아들이는 삶의 진여를 보게 된다는 것이다.
영화 어라이벌 이야기이다. 이야기의 사상적 출발은 언어가 인간의 사고를 결정한다는 명제이다. 왜 아니겠는가. 하지만 언어 때문에 우리의 사고에 시간개념을 결부되었다는 영화의 주장은 과한 것이 아닐까? 언어가 세계의 모사라는 비트겐슈타인의 말대로 언어에 시간이 있는 것은 세계에 시간에 있기 때문일 수 있다. 시공간에 대한 칸트의 주장을 살펴보자.
공간과 시간은 인간 심성의 주관적 성질로서, 경험으로 부터 독립적인 선천적 표상이다.
공간과 시간은 인간의 주관에 주어지지 않는 물자체에 대해서는 관념적인 것이다.
공간과 시간은 현상을 인식하는 형식으로 작용하여 현상에 대해서는 경험적 실재성을 가진다.
현상에 형식으로 작용함으로써 실재성을 가지는 공간과 시간은, 유클리드 기하학을 성립시킨다.
경험적 실재성을 가지는 이 공간과 시간은, 경험과는 관계없이 순수하게 수학적으로 규정된다.
모든 경험으로 부터 독립적인 인식 주관의 성질로서의 근원적 공간 표상과 근원적 시간 표상은, 현상과의 관련을 고려하지 않는 경우에는 아무런 실재성이 없다.
유클리드 기하학을 성립시키는 칸트의 근원적 공간표상과 근원적 시간 표상이 현상과 관계할 때, 현상들에 의해서 제한되어 생기는 부분공간 표상들과 부분시간 표상들은 현상의 형식으로서 실재성을 가진다.
칸트에 따르면 시공간의 개념은 인간이 사고하는 방식의 파운데이션인 것이다. 이는 마치 컴퓨터가 연산하기 위해 시스템 클럭과 메모리 어드레스가 있는 것과 같다.
따라서 인간에 내재한 시공간의 개념이 먼저 있은 후에 언어가 생겼고, 언어는 시공간의 개념을 내포하며, 따라서 무시무종한 무시간적인 유니버셜 랭귀지 같은 것은 존재할 수 없고, 영화처럼 있지도 않고 있을 수도 없는 그런 언어를 체득한다고 해서 과거 현재 미래 삼세를 통시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이쯤하면, 영화 어라이벌에 대해 너무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는 셈을 될 것인데, 그렇다면 아마도 원작자나 제작자의 트릭에 낚인 것일게다 소설가나 영화 제작자들이 하는 일이 바로 미끼를 던져 독자와 관객을 낚는 일이고, 그 과정을 통해 돈을 버는 것이 그들의 거의 유일한 목적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은 벌어들인 돈을 세면서 이렇게 말할 것이다. 진지하게 생각하지 마라고 이 호구야. 내가 미리 말했잖아. 말하는 낙지가 나온다고. 그렇다면 벌써 장난인 줄 알아야지 뭘 그렇게 심각하게 생각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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