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문하여 <<생거진천 사거용인 生居鎭川 死居龍仁>>이란 말을 이렇게 생각했었다. 진천에는 좋은 쌀이 많이 나서 살기 좋고 용인은 풍수적으로 음택의 길지라는 식으로 말이다.
찾아보니, 그런 것이 아니고 생거진천사거용인이란 설화 속 이야기에 나오는 판관의 판결문이다. 살아서 진천에 있었으니 죽어서는 용인에 있으라는 판결문이다.
생거진천사거용인
이 설화의 모티브는 죽은 자의 영혼이 새로운 육체에 접신해 다시 환생한다는 것이다. 이런 유형의 설화나 보고는 세계 각지에 상당히 많이 있는 편이다. 그러한 케이스를 모은 책들도 많이 있다.
Twenty Cases Suggestive of Reincarnation
환생 또는 보다 엄밀하게 전생의 기억에 관련된 보고는 인터넷에서 쉽게 찾을 수 있다. 그러한 보고들 중 상당수는 세인들의 흥미를 끌기 위한 거짓이나 착오들로부터 기인한 것들도 많겠지만, 그 모든 보고가 그럴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너무 인색한 태도라고 할 수 있겠다.
이러한 이야기를 들을 때 사람들이 취하는 태도는 대개 두 가지인 것 같다. 비과학적이고 사실이 아닌 주장이라는 태도가 그 하나이다. 영혼이나 전생, 정령이나 죽은 자의 의식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입장이다. 유물론적 무신론이다.
유물론
다른 하나의 태도는 신도 있을 수 있고, 영혼이나 환생도 있을 수 있다는 태도인데, 딱히 어떤 철학을 가지지 않았더라도 유물론이나 무신론이 아니기만 하면 그런 생각을 해 보기도 하는 것이다.
사람이 죽어서 육신이 없어지면, 정신도 영혼도 의식도 없어지고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는 유물론적인 주장은 사실 여부를 떠나 쓸쓸하고 매정한 주장인 것 같다.
나아가 눈에 보인지 않는 전자기력 같은 것도 실재하고, 귀로 들을 수 없는 초음파나 눈으로 볼 수 없는 비가시광선도 존재하는 마당에 유물론이 주장하는 물질이나 물체가 과연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 규정하기도 쉽지 않을 것 같다. 유물론을 주장하려면 그들이 주장하는 물체나 물질에 대한 정의가 선행되어야 하는데, 사실 이 물이라는 개념도 신이나 영혼이나 시간처럼 결국은 인간의 사고나 언어가 도달할 수 없는 형이상학적인 개념에 불과한 것이다.
그래서 영혼이나 신이나 운명론 같은 것을 믿으면 비과학적이고 무식한 사람이라는 식으로 짐짓 말하는 사람들도, 결국 삶과 죽음에 대해 모르기는 매한가지이고 똑같이 생로병사의 고통과 고민 속에 사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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