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이라고 아는 사람은 안다. 중국 무협작가로 아주 유명한 사람이다. 예전에 이 사람은 대한민국에서도 유명했는데 <영웅문>이라는 책이 잘 팔려 텔레비전에 광고도 했었다. 고려원이라는 출판사였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무협을 텔레비전에 광고한다는 것은 생각해 보면 정말 대단한 일이다.
김용 선생의 약력을 인터넷에서 검색해 보면 어마무시하다.
김용 (진융, 金庸, 查良鏞, Jin Yong, Louis Cha) 소설가
92세 (만 91세) 출생 1924년 2월 6일 (중국)
학력
캠브리지대학교 대학원 고고학 박사
캠브리지대학교 대학원 역사학 석사
캠브리지대학교 명예박사
소주대학교 국제법학
경력
1992 레종드뇌르 훈장
1981 대영 제국 훈장 (OBE)
수상내역
영국 캠브리지대학교 명예교수
일본 소카대학교 명예교수
중국 홍콩폴리테크닉대학교 명예교수
중국 쓰촨대학교 명예교수
캐나다 브리티시컬럼비아대학교 명예교수
중국 홍콩대학교 명예교수
중국 칭화대학 명예교수
중국 화교대학교 명예교수
중국 소주대학교 명예교수
중국 남개대학교 명예교수
중국 절강대학교 명예교수
중국 베이징대학교 명예교수
그는 다음과 같은 무협작품을 썼다.
《서검은구록》(書劍恩仇錄) 1955년: 첫 작품
《벽혈검》(碧血劍) 1956년:
《사조영웅전》(射鵰英雄傳) 1957년: 영웅문 1부
《신조협려》(神鵰俠侶) 1959년: 영웅문 2부
《설산비호》(雪山飛狐) 1959년:
《비호외전》(飛狐外傳) 1960년:
《의천도룡기》(倚天屠龍記) 1961년: 영웅문 3부
《원앙도》(鴛鴦刀) 1961년:
《백마소서풍》(白馬嘯西風) 1961년:
《연성결》(連城訣) 1963년:
《천룡팔부》(天龍八部) 1963년:
《협객행》(俠客行) 1965년:
《소오강호》(笑傲江湖) 1967년:
《월녀검》(越女劍) 1970년:
《녹정기》(鹿鼎記) 1972년: 마지막 작품
김용의 작품은 몇 개 보았지만, 지금 생각나는 것은 곽정, 양과, 소용녀라는 인명과 타구봉법이라는 무공과 왕중양, 구처기 같은 중국 도교 전진파의 인물들의 이름이다.
그래서 도교 전진파에 대해 검색을 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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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북송(北宋)시대 말에서 금(金), 원(元)나라 때에 걸쳐서 일어났던 신도교파(新道敎派)의 하나. 개조(開祖)는 왕철, 도호(道號)는 중양(重陽)이다. 왕철은 섬서성(陝西省) 함양현(咸陽縣) 출신으로서 말년에 산동지방(山東地方)에서 포교에 힘썼고, 그곳에서 마종의(馬從義)라는 토호를 제자로 삼았다. 마종의는 왕철이 죽은 뒤 전진교를 이어 받은 마단양(馬丹陽)이다. 그 뒤 구처기(丘處機;長春眞人), 담처단(譚處端), 왕옥양(王玉陽), 학광녕, 손불이(孫不二), 유장생(劉長生) 등 이른바 칠진(七眞)의 7대 제자를 받아들였다. 특히 구처기가 몽골왕조의 신임을 얻은 뒤부터 화북(華北)에 교세를 확장하여, 신도교의 필두로서 강남(江南)의 정일교(正一敎) 천사도(天師道)에 필적하는 교단이 되었다. 전진교의 교의종풍(敎義宗風)은 개조 왕철의 <중양입교십오론(重陽立敎十五論)>에 나타나 있는데, 구도교(舊道敎)의 미신적인 주술(呪術)과 부적(符籍) 등을 배격하고, 내관(內觀)과 수양에 의해서 오도(悟道)에 이르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점이 불교의 선종(禪宗)에 가깝다. 원나라 때 한때는 불교와의 불도논쟁(佛道論爭)에서 패했지만 재기하였고, 명(明)나라 이후에는 정일교와 교세를 양분했다. 특히 화북에서 번영하였으며 북경(北京)의 백운관(白雲觀)은 <전진제일총림(全眞第一叢林)>인 대본산이다.
왕철(1113∼118O)
중국 금(金)나라 도사(道士). 자는 윤경(允卿), 호는 중양자(重陽子). 함양(咸陽) 대위촌(大魏村;陝西省) 출생. 도교의 일파인 전진교(全眞敎)의 개조(開祖)이다. 회심(回心) 후 철(喆)로 개명하였고 개교(開敎) 후에는 이름을 철로 고쳤다. 송(宋)나라와 금나라가 교전하는 어려운 시대에 문무 양과에 응시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해 종남산(終南山) 밑의 유장촌(劉蔣村) 별장(別莊;뒤의 祖庭)에서 자포자기생활을 했다. 48세 때 감하진(甘河鎭)에서 어느 은인(隱人)으로부터 구전(口傳)으로 선단(仙丹)의 비결을 받았다는 이른바 <감하우선(甘河遇仙)>의 체험으로 종교생활을 시작했으며 노자(老子)와 선종(禪宗) 사상에 접하고 삼교(三敎)를 포섭하는 실천적 금욕주의의 새로운 도교를 1163년 무렵 세웠다. 신도를 모으기 위하여 산동반도(山東半島)에서 포교에 힘써 마단양(馬丹陽) 등 <칠진(七眞)>이라는 제자를 양성했으며 <삼교금련회(三敎金蓮會)>를 곳곳에 세웠다. 고향에서 전도하려고 찾아가던 중 개봉(開封:河南省)에서 병으로 죽었다. 주요 저서에 <중양입교십오론(重陽立敎十五論)> <금관옥쇄결(金關玉鎖訣)> <전진집(全眞集)> <교화집(敎化集)> 등이 있다.
장춘진인(長春眞人)(1148∼1227)
중국 도사(道士). 도호(道號)는 장춘자(長春子). 이름은 구처기(邱處機).
산동서하(山東棲霞) 출신. 금(金)나라 말기에서 원(元)나라 초기에 걸쳐 전진교(全眞敎) 개조(開祖)인 왕중양(王重陽)의 7진(七眞), 즉 고제자(高弟子) 7명 가운데 한 사람이다. 1219년 서정(西征)중이던 원나라 태조 칭기즈 칸의 부름에 따라 제자 18명을 거느리고 사막을 건너 태조와 만나 도교(道敎)의 최고책임자라는 칙명을 받고 연경(燕京, 北京)에 돌아왔다. 천장관(天長觀)에 거주했으며 뒤에 천장관을 장춘궁(長春宮)이라 개칭했는데 이곳이 명대(明代) 이후 전진교총림(全眞敎叢林, 총본산) 백운관(白雲觀)의 전신(前身)이다. 이 당시의 여행기 <장춘진인서유기(長春眞人西遊記)>가 있고, 이 밖에 문집 <반계집(磻溪集)> 등이 있다. 지금도 백운관에는 장춘조사(長春祖師)를 봉사(奉祀)하는 구조전(丘祖殿)이 있고 장춘진인 외에 장진인(張眞人) 이하 8명의 백운관 장교(掌敎;住持) 조사들을 좌우에 배치해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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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남송 시대, 금나라의 지배 하에 있던 산동 지방에서 성립한 유ㆍ불ㆍ도의 삼교 일치의 신흥 도교(道敎)와 그 교단. 도교 북종(北宗)이라고도 한다. 시조는 호농(豪農) 출신인 왕중양(王重陽, 1113~1170)이다. 전진교 사상의 핵심은성(性)을 원신(元神), 명(命)을 원기(元氣 ☞ 氣)로 보는 성명설(性命說)로, 원신, 즉 성은 우주의 근원, 사람의 근본이라 하여 이 성명(性命)의 심오한 뜻의 깨달음을 추구하였다.
이것은 종래의 약이나 부적의 힘에 의한 불로장생의 추구와 달리, 유학(도학), 불교(선종)의 영향을 받아 오로지 내관(內觀)과 진공(眞功 : 自利)ㆍ진행(眞行 : 他利)의 수행에 의하여, 복록수(福祿壽 ; 복과 녹과 장생, 즉 행복)를 추구했던 것이다. 이 교의는 욕(欲)을 멀리하고 치(恥)를 참으며 자신은 고초를 겪더라도 타인을 이롭게 하는 것을 강조했기 때문에, 이민족(異民族) 지배 하에 있던 서민의 마음을 사로잡았으며, 금(金)과 원(元)의 통치자의 보호를 받으며 급격히 발전하여 이후 중화인민공화국의 성립까지 큰 세력을 가지고 있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전진교 [全眞敎] (철학사전, 2009, 중원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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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교 합일을 모색했던 새로운 종파의 개조
왕중양 본문 이미지 1
왕중양(1112~1170)은 섬서성에서 세도 있는 부호 집안의 셋째아들로 태어났다. 당시 사대부 집안의 자제들이 모두 그러하듯 그도 어릴 때부터 유학을 공부하고 과거 시험을 준비했다. 그러다 대수롭지 않은 일로 스승의 노여움을 사 과거를 치를 수 없게 되었다. 하는 수 없이 관료가 되어 출세하겠다는 생각을 버리고 군인이 되기로 했다. 무과에 무사히 합격한 왕중양은 장래에 입신양명하겠다는 커다란 꿈을 가졌지만, 정작 주어진 직책은 변방의 작은 촌을 관리하는 일에 불과했다. 의기소침한 그는 관직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내려가 매일처럼 술을 마시다가 불교에 귀의하게 되었다.
왕중양에게 인생의 전기가 찾아온 것은 그의 나이 48세 때였다. 고향 주막에서 우연히 만난 한 남자로부터 금단도(金丹道)에 관한 구결(口訣 : 문서가 아닌 구두로 전해지는 비전(秘傳))을 받았던 것이다. 그 남자는 여동빈('부우제군' 항목 참조)의 화신이었다고 한다.
그 이듬해부터 그는 도교에 입문하게 되어, 도호(道號 : 불교의 법명과 같은 것으로 도사로서의 이름)를 중양자(重陽子)로 지었다. 그는 이제까지와는 다른 독자적인 수행법을 모색했다. 바로 '활사인묘(活死人墓)'라 불리는 것으로, 땅 속 수십 미터 깊이까지 파고 들어가 그 속에서 좌선을 한 채 명상에 잠기는 것이었다. 이렇게 하기를 2년, 그는 땅 속에서 나와 포교를 하기 시작했다.
왕중양의 가르침은 섬서성에서는 그다지 널리 퍼지지 않았지만, 산동성 일대의 주민들로부터는 압도적인 지지를 얻었다. 그래서 1167년, 마단양(馬丹陽)과 구장춘(丘長春)을 비롯한 뛰어난 제자들과 함께 전진교(全眞敎)라는 새로운 종파를 창시하게 되었다.
전진교의 가장 큰 특징은 도교의 『도덕경』과 함께 유교의 『효경(孝經)』1), 불교의 『반야심경(般若心經)』2)을 주요 경전으로 채택했다는 점에 있다. 즉, 세 종교의 주요 경전을 모두 받아들여 종교 간의 통합을 모색했던 것이다. 실제로 전진교는 도교 집단이면서도 좌선을 하고 탁발을 하는 등 불교의 선종(禪宗)에서 많은 교리와 실천들을 차용해왔다. 게다가 유교의 엄격한 윤리관도 함께 받아들였다. 당시 사람들은 이러한 전진교의 가르침을 대단히 신선하게 생각했다.
전진교의 계율은 상당히 엄격했는데, 도사들은 가족들과 일체의 연을 끊고 도관에서 집단 생활을 하며 수행에 진력했다. 이 종파의 목적은 기존의 도교처럼 신선이 되는 것이 아니라 수행을 통해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는 것이었기 때문에 수행이 엄격한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이런 점에서 전진교는 종래의 도교 종파와는 확연하게 구분되는 전혀 새로운 종파였다. 이들은 기복적인 성격을 지닌 주술적인 수단은 일체 사용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전진교는 앞서 말한 깨달음에 대한 열망에 기초한 무언가 새로운 목적이 있었을 것이다. 도교가 추구하는 목적은 '불사(不死)'의 실현이었다. 지금까지 존재해왔던 도교 종파의 가르침은 신심을 단련해서, 그 결과로 주술이나 단약의 효력을 이용해 하늘로 올라가는 것이었다. 그러나 전진교는 불사라는 기존의 희망 그 자체를 전혀 새로운 관점으로 전환시켜버렸다. 즉, 현세만이 인생이 아니며, 죽음은 전생(轉生 : 삶은 거듭난다는 윤회 개념의 불교적인 사고방식)을 위한 한 고비에 불과하다고 주장했다. 이렇게 되자 '불사=신선에 대한 열망'이라는 도식은 큰 의미를 잃어버리게 되었다. 말하자면, 죽음 그 자체가 멸망을 의미하지 않게 되었던 것이다.
인간의 생사에 대한 내부 의식의 변혁은, 전진교가 어떤 면에서 원시 시대 이래로 존재해왔던 주술적인 종교에서 탈피해 근대적 종교로 한 단계 도약한 종파였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중요한 증거라고 하겠다. 왜냐하면 인간의 죽음을 단지 주술의 실패로 인한 파탄으로 보는 원시적인 시각에서 벗어나 새로운 삶의 시작 또는 전체 과정 중에서 어느 한 단계라는 개념으로 발전시켰기 때문이다.
칭기즈칸에게 공인받은 전진교
왕중양이 죽은 뒤 교단을 이끌게 된 구장춘(=구처기 邱處機) 앞으로 당시 원정 중이던 칭기즈칸3)으로부터 초대장이 날아들었다. 그래서 구장춘이 먼길을 달려가자4), 칭기즈칸은 대뜸 장생의 방법에 대해 물었다. 구장춘은 이렇게 대답했다.
"장생의 방법 같은 것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다만 있다면 양생법이 있을 뿐입니다."
그리고 '애민지살(愛民止殺 : 사람을 사랑하고 죽이지 않는다)'이야말로 민중들의 지지를 받아 천하를 통일할 수 있는 근본 요소라는 주장을 펼쳤다. 당시 세상은 여진족이 세운 금나라와 몽골족의 원나라(1206~1368)가 중국 대륙을 놓고 치열하게 맞서 싸우고 있었기 때문에 전란으로 인한 민중들의 고초가 말할 수 없이 컸다. 따라서 몸소 이들을 위한 구제 활동을 펼쳤던 구장춘의 머릿속에는 당연히 민중들의 생명을 소중하게 여겨야 한다는 생각이 자리잡고 있었다.
이런 대답에 만족한 칭기즈칸은 구장춘에게 세금 면제를 비롯한 각종 특전을 베풀고 도교의 최고 지도자로 공인했다.
구장춘의 뒤를 계승한 윤지평(尹志平)은 전진교의 가르침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인간은 선을 좋아하고 악을 증오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으니 마음먹은 대로 행동하면 누구나 선인(善人)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마음을) 실행하지 않으면, 어느새 악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따라서 수행이 중요한 것이다. 수행을 크게 방해하는 것은 식(食)과 수면(睡眠), 욕정(欲情) 이 세 가지다. 과하게 먹으면 자게 되고, 잠은 욕정의 근원이 되기 때문이다. 욕망을 억제하기 위해서는 낮잠을 엄금해야 한다. 훌륭한 도사가 되려면 밤에도 옆으로 누워자서는 안 된다고 하는데, 구장춘 어른께서는 7년간이나 그것을 실행하셨다."
전진교는 칭기즈칸이 황제에 즉위하던 1206년부터 원나라가 멸망(1368)할 때까지 중국에서 가장 강력한 세력을 가진 종교가 되었다. 그 본거지였던 화북(華北) 지방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도교에 귀의해 신도가 되었다고 한다. 화북은 중국 인구의 약 5분의 1이 거주하는 지역으로, 당시 중국의 인구를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아마 수백만의 도교 신자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전진교의 총본산은 북경의 백운관(白雲觀, '부록' 참조)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왕중양 [王重陽, wangchongyang] (도교의 신들, 2007.10.26, 도서출판 들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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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중양, 중양자, 구처기 , 장춘진인 … 종남산….장춘관...백운관…. 어디선가 많이 들어본 이름들이다. 바로 무협지다.
왕중양 구처기 종리권 이런 사람들은 요즘으로 따지면 순복음교회의 조용기 목사나 금란교회의 김홍도 목사 쯤 되는 사람이었을 성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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