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극기 유감이라는 이전 포스트를 쓴 것은 사실 이 글을 쓰기 위한 워밍업과 같은 일이었다.
태극기 게양을 강제하던지 말던지 사실 그런 것은 내게는 아주 중요한 것은 아니다. 걸고 싶으면 걸고 걸기 싫으면 걸지 않아도 좋고, 거는 것을 강요하고 싶으면 하고, 말고 싶으면 강요 마라는 것이 내 생각이다. 내 생각에는 분명 태극기는 내 삶에 있어서는 아침에 정성껏 내리는 드립 커피 한잔 보다 중요한 문제는 아니다.
내가 정작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태극기의 유래와 의미이다. 나는 태극기를 볼 때마다 이상한 생각이 들곤 하는데 음양을 뜻하는 태극과 주역 팔괘 중의 네 개의 괘로 만들어진 이 태극기는 내가 알기로는 분명 중국에서 유래한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한국 사람들이 왜 중국에서 유래한 사상을 연원으로 하는 태극기를 국기로 사용하고 있는 것일까?
먼저 태극기의 유래와 의미를 약간 고찰해 보자.
인터넷에서 찾을 수 있는 한국 민족 문화 대백과에 따르면 그 유래가 상세하게 잘 나와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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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기문제가 최초로 거론된 것은 1880년(고종 17) 8월 일본에서 귀국한 수신사(修信使) 김홍집(金弘集)이 가져온 주일청국참찬관(駐日淸國參贊官) 황쥰셴(黃遵憲)의 ≪조선책략 朝鮮策略≫에서이다.
중국용기(中國龍旗)를 청나라에 주청(奏請)하여 군기(軍旗)와 국기로 사용하도록 권고한 이 제안에 따라 조선정부에서는 그 해 12월 1일에 입북(入北)한 진하겸동지사은사(進賀兼冬至謝恩使) 일행에 사역원부사직(司譯院副司直) 이용숙(李容肅)을 수행시켜 북양대신(北洋大臣) 이홍장(李鴻章)을 통하여 진전시켰던바, 조선순문(朝鮮詢問) 8조 중 제7조가 그것이다.
그 내용은 황쥰셴의 제안을 듣고 우리 나라의 선박에 사용할 기표(旗標)를 제정함에 있어서 참고로 중국선박에 사용하고 있는 기표와 우리 나라의 기표에 사용할 도식과 색상에 관하여 물은 것이다.
이에 대하여 이홍장은 1881년 2월 2일 올린 상주문에서 중국용기와 같은 화룡방기(畫龍方旗)를 국기와 선박기표로 사용하는 데 동의하고, 다만 제정과 사용의 절차상 문제에 대하여 용기의 척촌(尺寸)·회구(繪具)·안색(顔色)·도식(圖式) 등은 북양대신에게 자문을 구하여 처리하도록 하는 방안을 제시하였다.
이에 대하여 2월 4일 청나라 덕종(德宗)은 조선정부에 회자(回咨)할 것을 명하였고, 이 회자문은 3월 16일 성경예부(盛京禮部)의 자문으로 조선정부에 전달되었다. 그러나 그 뒤 조선정부에서 어느 정도 구체화시켰는지는 불명하다.
국기문제가 재론된 것은 조미조약이 체결되던 1882년 4월 6일의 일로, 조선측의 전권부관(全權副官) 김홍집과 청사(淸使) 마젠충(馬建忠) 사이에서 대두되었다. 재론의 계기가 된 것은 양국 사신의 업무연락을 담당하였던 홍로시(鴻臚寺) 사품(四品) 이응준(李應俊)이 일본국기와 유사한 구도의 조선측 국기도안을 마젠충에게 제시한 데서 비롯되었다.
이 논의에서 마젠충은 황쥰셴이 제안한 중국용기의 사용을 반대하면서 조선국왕의 복색·문양 및 조야복색 등을 기초로 하여 백저청운홍룡기(白底靑雲紅龍旗)의 도식을 제안하였으며, 다만 용조(龍爪)를 4자로 하여 중국용기와 구별되도록 하였다. 그 뒤 4월 11일 김홍집은 이응준이 제시한 도식의 수정안으로 홍색을 청·백색으로 바꾸어 권자(圈子)하여 일본국기와 혼돈되는 것을 방지하는 안을 제시하였다.
이 때 마젠충은 백저(白底)에 중앙에 반홍반흑(半紅半黑)의 태극도(太極圖)와 그 둘레에 팔도(八道)를 뜻하는 흑색의 팔괘(八卦) 및 홍색의 주연(周緣)이 있는 도식을 제안하였다.
이러한 태극·팔괘도식의 국기제정문제가 조선정부에서 논의되었다는 것은 1882년 8월 9일 특명전권대신 겸 수신사 박영효(朴泳孝)가 메이지환(明治丸) 편으로 출항한 다음 영국인 선장과 상의하여 태극기 대·중·소 3본(本)을 만들었다는 것과, 태극도에 반홍반흑을 사용하자는 마젠충의 제안이 반홍반청으로 발전하고 있다는 사실로 미루어 보아 알 수 있다.
박영효는 8월 22일 태극기 소본(小本)과 함께 국기제정사실을 군국기무처(軍國機務處)에 보고하였으며, 1883년 1월 27일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統理交涉通商事務衙門)의 장계에 따라 팔도사도(八道四都)에 행회(行會)함으로써 태극기가 정식으로 국기로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현행 태극기를 대한민국 국기로 정식 공포한 것은 1949년 10월 15일이다.
태극 도형의 문양(文樣)과 이념은 고대로부터 우리 민족에게 전통적으로 쓰여왔다. ‘태극’이라는 용어는 ≪주역≫ 계사(繫辭) 상(上)에 나오지만 그림은 그려져 있지 않다. 중국에서 태극의 문양이 보이기는 송나라 때로, 주돈이(周敦頤, 1017∼1073)가 처음으로 ≪태극도설 太極圖說≫을 지었는데, 그 연대는 11세기 이상을 올라가지 못한다.
그러나 우리 나라에는 ≪태극도설≫보다 약 400년 전인 628년(신라 진평왕 50) 건립된 감은사(感恩寺)의 석각(石刻) 가운데 이미 태극도형이 새겨져 있었으며, 1144년(인종 22)에 죽은 검교대위(檢校大尉) 허재(許載)의 석관(石棺) 천판(天板)에도 태극문양이 뚜렷하게 새겨져 있다.
태극이나 태극에 내포된 음양사상은 우리 나라 고대의 문화유적이나 생활습속을 통해서 잘 알 수 있는데, 예를 들어 고구려 고분의 벽화나 민속설화 또는 의학에 있어서 병리·생리 등을 음성·양성으로 분류하는 사상의학(四象醫學)이 그것이다.
고구려 고분내의 사신도(四神圖)라든지, 특히 현무도(玄武圖)는 음양상화(陰陽相和)의 이치를 나타낸 것으로, 우리 나라의 고대민속에서 액(厄)막이하는 부적(符籍)으로 사용되어 왔다.
이렇게 볼 때 중국의 태극도형 등이 전래되기 이전부터 우리 나라는 태극도형 또는 그것이 머금고 있는 음양사상을 일찍부터 이해하고 활용해 왔음을 알 수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태극기 [太極旗]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이렇게 볼 때 중국의 태극도형 등이 전래되기 이전부터 우리 나라는 태극도형 또는 그것이 머금고 있는 음양사상을 일찍부터 이해하고 활용해 왔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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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글의 후반부는 태극기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민족 고유의 것임을 부연하고 있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먼저 음양이라는 이원적인 것의 상반된 대립이라는 개념은 사실 어느 나라의 것이라 할 수 없이 인간이라면 대개 생각할 수 있는 보편적인 개념임을 인정하도록 하자.
감은사의 태극도형이란 어떤 것일까? 과연 이것이 태극기의 태극과 같은 것을 의미하고 있는 것일까?
태극문양이 새겨진 석재다른 절터에서는 보기 드문 태극문양과 기하학적 무늬가 눈에 띈다.
이 논의를 계속하면 유사역사학으로 빠져든다. 사이비 과학, 유사 과학 보다 더 무서운 것이 유사 역사이다.
중국 상고시대의 신화적인 인물인 황제가 동이족이란 둥 공자가 동이족이라는 둥, 중국의 고대 지배계층이 한반도의 이주민족 이었다는 둥.
반박하기도 어렵고 귀찮고 의미 없는 이 같은 유사역사학의 주장들은 찾아보면 끝을 모를 정도로 넘쳐난다.
그들의 주장에 따르면 고대 중국의 모든 것은 한반도와 연관이 있다고 말해야 할 정도가 되는 것이다.
정리해보자. 유사역사학의 주장을 믿지 않는다면, 태극기는 분명 중국 고유의 철학 사상에 근원하는 것으로 중국인이 제안한 것임에 틀림없다.
나는 이것이 심히 기괴하다고 생각하는데, 대부분의 한국 사람들은 이 같은 주장을 하는 나 같은 사람이 더 기괴하다고 말할 것이다.
나와 다른 사람들은 어떤 차이가 있는 것일까? 나는 중국철학을 공부했고, 중국의 도관에 가봤지만 다른 한국 사람들은 별로 그런 사람들이 없다는 차이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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