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날 작명이나 사주 이야기만 한다면 곧 사람들은 나를 무식한 사주쟁이라고 평할지도 모른다.
그래서 간혹 유식한 말도 좀 하고 그래야 하는데, 오늘은 문득 사르트르가 떠올랐다. 떠올랐다고 해도 사르트르라는 사람이나 그 철학에 대해 잘 알 도리는 없는 것이다. 예전에 읽었던 어떤 책에서 보았던 기투라는 용어가 생각났던 것에 불과하다.
그래서 그에 대해 인터넷을 검색해 보니 오래 전에 책에서 보았던 것과 비슷하게 알 수 없는 말이 가득하였다. 알 수 없는 모든 말이 심오하거나 의미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마찬가지로 내가 절대 이해할 수 없는 말들 가운데 진리가 있을 수 있다는 것도 인정한다.
다른 철학들과 마찬가지로 사르트르의 말들도 진리이거나 넌센스에 불과하거나 둘 중 하나일 것이다. 물론 내기를 걸어야 한다면 넌센스에 걸겠다. <무를 무화한다>는 어떤 철학자의 말이 넌센스가 아니라면 무얼까?
철학자는 남들이 알 수 없는 말을 지꺼리는 것으로 먹고 사는 사람이며, 대부분의 학자는 공부하는 시늉을 하면서 먹고 사는 사람이고 말한다면 나를 보고 심사가 꼬여있는 사람이고 말할 것이다.
인터넷에서 누군가 블로그에 정리한 글이 조금 이해될 듯 하지만, 큰 의미가 있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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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정리
이러한 사르트르의 존재론에서 들어나는 의식의 주체인 인간의 두드러진 특징은 바로 인간은 항상 자유롭다는 점이다. 즉 인간은 자유롭지 않을 자유가 없으며, 영원히 자유롭도록 '선고'를 받은 것이다. 한마디로 인간이 자유라는 것은 사르트르에게 있어서 인간의 존재론적 특성, 즉 무언가를 지향할 수 밖에 없다는 점에서 발생하는 당연한 결과이다. 따라서 인간은 죽는 순간까지 실존의 어려움을 껴안고 살아가는 존재로 여겨진다. 인간은 한순간이라도 자신의 의식을 비어 있는 상태로 둘 수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이 세계에서 무엇인가를 계속해서 겨냥하고 잘라내어 그것에 의미를 부여함과 동시에 그것을 가지고 자신의 의식의 지향성의 구조를 채워야만 하는 것이다. 즉 인간은 죽을 때까지 결여로 있는 자신의 의식을 무엇인가로 계속해서 채워야 하는 실존의 조건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 이런 의미에서 사물존재의 존재론적 우위, 곧 의식을 가지고 있는 인간존재 (대자존재) 에 대한 즉자존재의 ‘존재론적 우위’를 이해할 수 있다.
[출처] 장폴 사르트르Jean-Paul Sartre|작성자 Roquent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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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 의식은 끊임없이 대상을 주시하게 되는데, 이러한 의식을 일차적으로는 자신의 몸이나 정신을 주시하도록 변경하며, 최종적으로는 아무 대상에 대해 주시하지 않도록 수행 하는 것이 불가나 선가의 가르침이 아닌가?
그건 그렇다 치더라도 여기서는 기투와 피투에 대해 메모를 하고 넘어가는 것으로 정리하는 것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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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상학사전
기투
[ 企投, Entwurf, projet ]
외국어 표기
pro-jet(프랑스어)
하이데거에게서 유래하는 용어. 『존재와 시간』에 따르면 기투(실존성)는 피투성(사실성) 및 퇴락과 더불어 현존재의 존재인 조르게(관심)를 구성한다. 현존재의 개시성의 하나의 계기인 이해는 기투라는 실존론적 구조를 지닌다. 즉 이해는 현존재가 스스로의 존재 가능성을 향해 몸을 던지는(스스로를 기투하는) 일인바, 기투는 스스로의 존재 가능(Seinkönnen)에로 개시하면서 관계하는 가운데 존재하는 일인 것이다. 그때 현존재는 스스로를 세계(세상)로부터 이해 · 기투함(비본래적 기투)일 수도, 가장 고유한 존재 가능으로부터 이해 · 기투함(본래적 기투)일 수도 있다. 또한 가능성은 무차별적인 자유가 아니고 현존재는 한정된 가능성들로 들어가고 있기 때문에, 기투는 자의적인 선택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피투적인 기투이다.
계보를 더듬어 가면 기투는 후설의 '나는 할 수 있다'를 전개시킨 것으로 볼 수도 있겠지만, 본질적으로는 근대적 주관성의 자율적 능동적 성격을 계승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전회> 이후의 하이데거는 기투보다 피투성을 강조함과 동시에, 존재에 의해 던져져 존재의 밝힘 속으로 탈자적으로 서는 것이 피투적 기투라고 해석하게 된다. 다른 한편, 기투는 하이데거 이후의 철학, 특히 현상학에 의해 수용되었다. 사르트르는 의식이 스스로의 가능성을 향해 즉자로부터 탈출하는 것을 기투라고 부르며, 전기 메를로-퐁티는 후설의 의식의 지향성을 신체의 세계기투(세계에 내속하면서 세계를 경험하고 묘사하는 것)라고 해석하여 현상학의 새로운 국면을 열었다.
-고토 요시야(後藤嘉也)
[네이버 지식백과] 기투 [企投, Entwurf, projet] (현상학사전, 2011. 12. 24., 도서출판 b)
피투성
[ Geworfenheit, thrownness, 被投性 ]
피투성(내던져져 있음)은 우리가 스스로 결정하지 않았음에도 이미 세계 속으로 우리가 이미 던져져 있다는 것을 나타내는 말이다. 우리는 우리가 반성하여 알기 이전에 이미 언제나 하나의 세계 속에 들어선 채로 머물고, 이러한 사실은 불안과 같은 일정한 기분 속에서 뒤늦게 알려진다. 이 점에서 인간은 근본적으로 세계 속으로 피투된 세계-내-존재인 것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피투성 [Geworfenheit, thrownness, 被投性] (서울대학교 철학사상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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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세상에 피투된 가운데 기투할 수 있는 존재가 인간이란 말인데, 쉬운 말을 참 어렵게 썼다는 생각이 든다. 인간은 가능한 한도 내에서 자유롭단 말 아닌가?
무식한 사주쟁이로서 다시 표현해 본다면, 인간이 피투된 것은 사주팔자라는 명운이 있기 때문일 터이고, 기투할 수 있다는 것은 사주팔자도 안 맞는 구석이 있다는 말일 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