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사람들은 인간 또 존재 일반이 영속한 실체가 아니고 끝없이 변천하는 가상의 존재라는 개념에 놀라는 듯 하다. (물론 요즘은 서양에도 동양사상에 대한 이해가 조금은 깊어져 예전 만큼 놀라는 것 같지는 않다)
그래서, 김아타 같은 사진 작가가 이런 측면을 살짝 일깨워 주기만 해도 놀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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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하는 모든 것은 사라진다.

김아타의 [온 에어 프로젝트 110-1; 타임스퀘어, 뉴욕]은 마천루 속 도심의 거리를 찍은 사진이다. 그림을 찬찬이 들여다보자. 우선 빌딩을 덮고 있는 화려한 광고판들이 우리들의 시선을 빼앗는다. 거리는 텅 비어 있다. 도로의 자동차나 보도의 사람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다.
이 사진은 하루 중에 언제쯤 찍은 것일까? 맑고 밝은 하늘로 봐서는 햇살이 좋은 낯 풍경처럼 보인다. 그런가 하면 앞쪽 건물 주변의 어둠으로 봐서는 여명(黎明)이거나 땅거미 내려앉는 저녁 풍경에 가깝다. 동일한 화면 공간에 서로 다른 시간대의 풍경을 동시에 포착한 것일까?(종교화나 역사화에서는 서로 다른 시간과 공간의 사건을 한 화면에 구성하는 이시동도(異時同圖)의 수법을 자주 활용한다.) 그러나 그것은 인간의 인지 능력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다. 더구나 사진 예술은 모든 피사체를 있는 그대로 재현하고 기록하지 않는가? 그렇다면 이 사진은 이미지를 임의로 조작한 것인가? 도대체 저 기묘한 공간은 어떻게 탄생한 것일까?
다시 이 사진을 자세히 보라! 도로의 소실점을 중심으로 안개나 연기 같은 희뿌연 흔적을 감지할 수 있다. 마치 먼지가 바람에 흩날리는 모습이다. 진공상태와 같은 그 희미한 흔적 사이로 작은 불똥 같은 정체불명의 물체가 떠돌고 있다. 놀랍게도 이 사진은 도시 사람들의 일상 활동이 왕성하여 거리가 아주 번잡한 시간에 찍은 것이다. 그렇다면 실제 살아 움직이고 있거나 에너지를 보유하고 있는 사물들은 어디로 바람처럼 휙 사라져버린 것일까?
이 모든 비밀은 김아타의 <온 에어(On Air) 프로젝트>의 사진 촬영 기법에 숨어 있다. 이 작품은 8시간의 장노출 기법으로 찍었다. 장노출로 촬영하면, 사진의 피사체인 사물은 움직이는 속도에 비례하여 사라져 간다. 날아가는 새는 빨리 사라지고, 움직이는 물체는 천천히 사라진다. 건물처럼 정지된 물체는 또렷하게 남는다. 그리하여 살아 움직이는 모든 것은 유령처럼 사라져버리고, 우리는 그 움직이는 물체가 남겨 놓은 희미한 에너지의 흔적을 가까스로 걷잡을 수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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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이런 식의 예술이라면 이런 예술도 제안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디지털 시각화 예술이다. 인간이 수태하여 배아상태에서 점차 성장하여 인간의 모습을 갖추고, 다시 점차 노화하여 사망하고 결국 탄소로 분해되는 과정을 5분 정도로 축약하여 보여주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인간 외부에 존재하는 (음식물 또는 다른 것으로 표현된) 탄소들이 인체에 동화되어 세포를 구성하고, 또 세포의 일부는 탈락하여 다시 탄소로 환원되어 인체의 외부로 배출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또 호흡을 통해 끝없이 산소와 이산화탄소가 이동화는 과정을 보여준다. 결국 5분 동안 인간의 존재와 생멸을 보게 되겠지만, 다른 측면에서는 단지 탄소들의 이동과정만을 보게 될 것이다.
결국 인간이란 것도 탄소나 다른 유기물, 무기물들의 이합집산에 불과한 것인가? 공한 것도 같으면서 뭔가 있음과 없음을 여읜 중도의 세계가 각성될 듯도 하다.
세상이 끓는 된장국 위에 떠있는 두부 만큼 견고한 세계라는 것을 아는 정도로는 불교의 사상을 이해했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가 맨틀 위에 떠있는 움직이는 땅을 밟고 서 있다는 사실을 안다고 해서 별로 달라지는 것은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것이 무엇인지 깊게 사유해 보는 것은 미래의 소일 거리로 남겨 놓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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