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1월 17일 토요일

용수의 중론


   전이 출판 문화의 전성기였는지도 모른다그때만 해도 우리 집에는 세계문학 전집 100여권이 있었고, 50여권의 한국문학 전집도 있었고불교 신자 어머니를  중학교  친구 집에는 대략 2-30여권으로  불교사상전집이 있었다.

나는  친구 집에 놀러 가면 방에 배를 깔고 엎드려 불교사상전집 중의  권을 (무슨 말이지도 모르면서읽고는 했는데그때가 중학교 때임을 생각한다면 나의  삶의 경향성은 이미 정해졌던 것인지도 모른다.  ( 무렵 집에서는 파란색 고급장정본의 사서삼경 한글 번역본 전집을 보고는 했다.)

그때 읽었던 불교사상전집  지금 생각나는 것은 많지 않은데 갑자기 용수의 중론이라던가 대지도론 같은 이름이 떠올랐다.

그래서 용수라는 이름으로 검색을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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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의 이름은 나가르주나(Nagarjuna)이며, 용수(龍樹)는 산스크리트어로 용()을 뜻하는 나가(naga)와 나무[]를 뜻하는 아가르주나(agarjuna)를 한자로 옮겨 표기한 것이다. 한국ㆍ중국ㆍ일본 등 동북아시아 지역에서는 모두 용수라는 이름으로 나타내며, 존칭(尊稱)으로 용수보살(龍樹菩薩)이나 용수대사(龍樹大士)라고 부르기도 한다. 밀교()에서는 ‘용맹(龍猛)’이라고 나타내기도 한다.

인도 중부 데칸고원(Deccan)에 있는 비다르바(vidarbha) 출신으로 알려져 있다. 처음에는 브라만교(Brahmanism)의 교리를 공부하였으며, 카시미르(Kashmir)와 인도 북부 지역을 두루 여행하며 소승불교의 경전도 깊게 공부하였다. 그리고 ≪반야경(般若經)≫ 등의 대승불교 경전을 공부하여 새롭게 발흥하던 대승불교의 교리를 체계화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당시 인도 중남부의 사타바하나 왕조(Satavahanas)는 하이데라바드(Hyderabad) 인근에 불교 강원(講院)을 세워 실론과 간다라, 중국 등지의 유학승들을 머무르게 했는데, 용수는 만년에 이곳에서 사타바하나 왕조의 보호를 받으며 가르침을 펼쳤다. 그래서 강원이 있던 곳은 그의 이름을 따서 나가르주나 언덕이라고 불렸다고 전해진다.

용수는 공()과 중도(中道) 이론을 체계화하여 대승불교의 발전에 큰 영향을 끼쳐 대승8종(大乘八宗)의 종사(祖師)라고도 불린다. 그는 모든 현상은 그 나름의 인과관계로 나타난다는 석가의 연기설(緣起說)을 바탕으로 대승불교의 기반이 된 ≪반야경≫에서 강조된 ‘공()’을 논증하였다. 그는 모든 현상은 인과관계로 나타나는 것이므로 스스로 독립해 존재하는 불변의 실체는 없다고 보고, 모든 존재는 무자성(無自性)이며 공()이라고 하였다. 그래서 용수의 공은 무자성공(無自性空)이라고 나타내기도 한다.
[네이버 지식백과] 용수 [龍樹] (두산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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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수의 중론을 검색하니 다소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되었는데동국대학교 불교학술원에서 고려대장경을 한글로 번역해 인터넷에 제공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타이핑 하기도 힘든  많은 분량을 번역해  그분들의 구도자적 노력에 감탄해 마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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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대장경은 한국 불교문화의 보고로 역사철학문학예술  다양한 분야에 걸쳐 막대한 영향을 미쳤다몽골침략의 전란 속에서도 국민들의 마음을 하나로 결집시키기 위해 16년에 걸친 대역사 끝에 완성을  우리문화 유산의 정수이자 세계적인 자랑거리이며고려대장경판을 보관하고 있는 장경판전은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문화유산이기도 하다

고려대장경은 현존하는 세계의 대장경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일  아니라체재와 내용에 있어서 가장 완벽한 대장경으로 평가받고 있다고려대장경은 (((삼장(三藏 아니라대승경전[菩薩藏] 경의 논소(論疏)ㆍ전기(傳記)ㆍ여행기ㆍ목록·사전류 등이 포함되어 있어 실로 방대한 일대 총서(叢書)   있다

고려대장경을 우리말로 옮기는 작업은 1964 동국역경원에서 한글대장경 1 『장아함경(長阿含經)』을 시작으로 36년간의 대장정을 거쳐 318권으로 완간되었다

우리나라 최초로 고려대장경을 완역한 한글대장경은 한국불교 현대사의 중요한 소득일  아니라 한문문화권에서 한글세대로 이어지는 우리 민족 문화사와 불교사에 일대 전환점을 마련했다고   있다‘불교는 어렵다’는 통념을 깨고 신행의 현장에서 보다 쉽게 부처님의 가르침을 만날  있는 길이 한글대장경으로부터 열렸기 때문이다

어느 종교나 마찬가지이지만  종교의 발전은  시대의 말과 글로  경전의 활용에 달려 있다이런 점에서   우리말로  한글대장경은 불교의 대중화와 현대화에 기여하고불교학 발전에 밑거름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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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에서 중론을 검색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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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국대학교 불교학술원 한글대장경
경명으로 <중론검색



중론 제4권

  용수보살 지음

  요진삼장 구마라집한역

  범지 청목주석

  박인성 번역

22. 여래를 관찰하는 장[觀如來品] 16

  [모든 세간에서 존귀하신 분을 들라면 오직 바르게 변지(遍知)하시는 여래가 있을 뿐이다법왕(法王)이라 불리는 일체지자(一切智者 분은 존재하신다.

  [이제 자세히 생각해 보라만약 존재한다면 파악되어야 한다만약 존재하지 않는다면 무엇에 의해 파악되겠는가 이렇게 말하는가여래는 다음과 같다.

  5온이 아니네. 5온을 떠난 것이 아니네 분과 그것이 서로의 속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네.

  여래가 5온을 소유하는 것이 아니네어디에 여래가 존재하겠는가? (1)

  만약 여래가 실재한다면 5온이  여래이겠는가, 5온을 떠나 여래가 존재하겠는가여래 속에 5온이 존재하겠는가, 5 속에 여래가 존재하겠는가여래가 5온을 소유하겠는가이것들은 모두 옳지 않다. 5온이  여래인 것은 아니다 그러한가생멸의 () 갖기 때문이다. 5온은 생멸의 상을 갖는다만약 여래가  5온이라면 여래는 생멸의 상을 갖는 것이 된다만약 생멸의 상을 갖는다면 여래는 무상해서 단멸 따위의 과실이 있을 것이다 취착하는 [受者] 취착[受法] 하나가  것이다취착하는 자는 여래이고 취착은 5온이다이것은 옳지 않다그러므로 여래가  5온인 것은 아니다.

  5온을 떠나서 여래가 존재하는 것도 아니다만약 5온은 떠나 여래가 존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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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다면 생멸의 상을 갖지 않을 것이다만약 그렇다면 여래는 상주 따위의 과실이 있을 것이다  등의 감관[]들은 보거나 인식하지 못할 것이다그러나 이것은 옳지 않다그러므로 5온을 떠나 또한 여래가 존재하지 않는다.

  여래 속에 5온이 존재하는 것도 아니다 그러한가만약 여래 속에 5온이 존재하는 것이 마치 그릇 속에 과실이 있고  속에 물고기가 있는 것과 같다면다름이 있게 된다다름이 있다면위에서 말한 바와 같은 상주 따위의 과실이 있게 된다그러므로 여래 속에 5온이 존재하는 것도 아니다.

  또 5 속에 여래가 존재하는 것도 아니다 그러한가만약 5 속에 여래가 존재하는 것이  위에 사람이 있고 그릇 속에 우유가 있는 것과 같다면그렇다면 다름[] 있게 되어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은 과실이 있다그러므로 5 속에 여래가 존재하는 것도 아니다.

  여래가 5온을 소유하는 것도 아니다 그러한가만약 여래가 5온을 소유하는 것이 마치 사람이 자식을 소유하는 것과 같다면그렇다면 다름이 있게 된다만약 그렇다면 위와 같은 과실이 있게 되니이것은 옳지 않다그러므로 여래가 5온을 소유하는 것이 아니다이와 같이 다섯 가지로 구해 보아도 얻을  없으니 어떤 것들이 여래이겠는가?

  [이와 같은 주장[]으로 여래를 구해 보아도 얻을  없다그러나 5온이 화합해서 여래가 존재한다.

  [] 5온이 화합해서 여래가 존재한다면 자성이 없는 것이네.

   자성이 없는데 어떻게 타성에 의존해서 존재하겠는가? (2)

  만약 여래가 5온이 화합해서 존재한다면 자성이 없는 것이다 그러한가? 5온의 화합에 의존해서 존재하기 때문이다.

  [여래는 자성으로서 존재하지 않는다단지 타성에 의존해서 존재할 따름이다.

  [자성이 없는데 어떻게 타성에 의존해서 존재하겠는가 그러한가타성 또한 자성이 없는 것이다 서로 의존하지 않기 때문에 타성을 얻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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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 없고얻을  없기 때문에 타성이라 하지 못한다.

  만약 어떤 () 타성에 의존해서 발생한다면 이것은 ‘나()’가 없는 것이네.

  ‘나’가 없는 법인데 어떻게 여래이겠는가? (3)

  또 만약 어떤 법이  () 의존해서 발생한다면 ( 법은‘나’가 없는 것이다마치 다섯 손가락에 의존해서 주먹이 있을   주먹에는 자체(自體) 없듯이그렇듯이 5온에 의존해서 ‘나’라    ‘나’에는 자체가 없는 것이다‘나’에는 중생ㆍ사람[]ㆍ천신ㆍ여래  여러 가지 이름이 있다만약 여래가 5온에 의존해서 존재한다면 자성이 없는 것이다자성이 없기에 ‘나’가 없다‘나’가 없는데 어떻게 여래라 말할  있겠는가그래서 게송에서 “만약 어떤 법이 타성에 의존해서 발생한다면 이것은 ‘나’가 없는 것이네‘나’가 ()인데 어떻게 여래이겠는가?”라고 읊은 것이다.

  자성이 없는데 어떻게 타성이 있겠는가?

  자성과 타성을 떠나서 무엇을 여래라 하겠는가? (4)

  또 자성이 없다면 타성 또한 있지 않다자성에 의존하기에 타성이라 하는 것이다이것이 없기에 저것도 없다그러므로 자성과 타성  모두 없는 것이다자성과 타성을 떠나서 무엇을 여래라 하겠는가?

  또

  만약 5() 의존하지 않고 먼저 여래가 존재한다면

  지금 5온을 취착(取著)하는 것이기에 여래라 말하네. (5)

  지금 실제로는 5온을 취착하지 않으니 다시 여래가 존재하지 않네.

  (5온을취착하지 않아 (여래가존재하지 않는데 지금 어떻게 취착하겠는가? (6)


[142 / 187] 쪽

  만약 아직 취착하지 않았다면 취착되는 [受法]1) 취착이라 하지 않네.

  취착이 없다면 여래라 하지 않네. (7)

  만약 같음과 다름에 의거해서 여래를 구할  없다면

  다섯 가지로 구해 보아도 (여래가존재하지 않거늘 어떻게 취착 속에 존재하겠는가? (8)

  또 취착되는 것인 5온은 자성에 의해서 존재하지 않네.

  자성이 없는데 어떻게 타성이 있겠는가? (9)

  만약 5온을 아직 취착하지 않았는데 먼저 여래가 존재한다면  여래는 지금 5온을 취착해서 여래가  것이리라그러나 실제로는 아직 5온을 취착하지 않았을 때는 먼저 여래가 존재하지 않는데 지금 어떻게 (5온을취착하겠는가아직 5온을 취착하지 않았다면 5온을 취착(取著)이라 하지 않는다취착이 없다면 여래라 하지 않는다 여래는 같음과 다름에 의거해서 구해 보아도 얻을 없다. 5 속에서 다섯 가지로 구해 보아도 얻을  없다그럴진대 5 속에여래가 존재한다고 말할  있겠는가 취착되는 것인 5온은 자성에 의해서 존재하지 않는다만약 타성에 의해서 존재한다고 말한다면자성에 의해서 존재하지 않는데 어떻게 타성에 의해서 존재하겠는가 그러한가자성이 없기때문에 타성 또한 없다.

  이런 이치가 있기에 취착함도 ()하고 취착하는 자도 공하네.

  어떻게 공한 것으로 공한 여래를 말하겠는가? (10)

  이런 이치로 사유해 보면 취착함[] 취착하는 [受者모두 공하다만약 취착이 ()하다면 어떻게 공한 취착으로 공한 여래를 말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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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과 마찬가지로   모를   모를 그럴 이야기이다인터넷을 검색하니 중론을 번역한 책이 PDF파일 형태로 돌아다니고 있었다지금이라면 인터넷이 연결된 컴퓨터만 있다면 다른 아무런 자료가 없더라도 동양학을 연구할  있는 시대가 분명  것이다.

늙어서  일이 없는 때가 된다면이런 것을 연구하면서 소일할  있을 것이니 소일거리 걱정은 없는 편이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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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가르주나 중론, 서정형, 서울대 철학 사상 연구소 2004>

제3부『중론』의 주요 주제어 분석
1. 이제론(二諦論)
1.1. 이제(二諦)의 구분
붓다는 두 가지 진리[二諦]에 의존해서 가르침을 폈다. [그 둘은]
일상적 관점에서의 진리[世俗諦, samvrti-satya]와 궁극적 관점에
서의 진리[第一義諦, paramartha-satya]이다.(MS 24.8) // 두 가지
진리의 차이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은 붓다가 설한 교설의 깊은 진
실을 이해할 수가 없다.(MS 24.9) // 인연으로 생겨난[衆因緣生,
pratitya-samutpada] 모든 것을 우리는 공[, sunyata]하다고 말
한다. 그것은 임시로 시설된 것[假名, prajnapti]으로 이것은 또한
중도[中道, madhyama pratipat]이다.(MS 24.18) // 어떤 존재도
인연[因緣, pratiya-samutpanna]으로 생겨나지 않는 것은 없다. 그
러므로 어떠한 존재도 공하지 않은 것이 없다.(MS 24.19)
<대표 해설>
물이 수증기로 변할 때, 우리는 “물이 소멸하고 수증기가
생성되었다”고 말한다. 그것은 끊임없는 연기적 변화로서가
아니라, ‘물’과 ‘수증기’라는 이름으로 구획하고 고착화시킨
실체론적 사유 관행에서 통용된다. 이것이 바로 일상적 차원
의 진리 곧 세제(世諦)이다. 이 세제는 제한적 의미의 진리이
다. 왜냐하면 물과 수증기라는 것은 임시적, 방편적 이름[
]이요생성과 소멸이라는 현상 또한 그러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연기적 관점에서 볼 때에는 조건들의 이합 집산
에 의한 찰나적 변화만이 존재할 뿐, 물이라든가 수증기라고
규정할 만한 대상은 경험적으로 포착되지 않는다. 언어는 변
나가르주나 『중론』39
화를 따라잡을 수 없고, 변화를 드러내는 적절한 수단도 아닌
것이다. 생성과 소멸 역시 언어적 관습일 뿐, 그러한 현상도
실재하지 않는다. 그러나『중론』 24장 18게와 19게에서 보듯
이 두 개의 진리는 상호 의존적이며, 실재의 다른 표현이다.
말로 할 수 없는 것이 제일의제이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속제
이다. 여러 가지 부속품에 의존해서 수레라는 말이 있고, 오
온에 의존해서 중생이라는 관념이 성립한다. 수레나 중생은
부속품과 오온을 떠나서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며,
자기 동일성을 갖지 못하는 비실체적 존재이다. 그러므로 수
레나 중생에 대해 마치 실체인 양 이름을 붙이는 것이 속제
이다. 즉 우리의 일상적 언어와 관념은 ‘실체적 존재가 아닌
것을 지칭하는’ 속제로서 허망한 법[妄法]이라고도 한다. 실
체적 존재가 아닌 것은 물론 인연에 의해 생기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가명은 속제요, 공과 무아는 제일의제이다.
<상세 해설>
사물[, dharma]은 존재하는 것도 아니요[非有], 존재하지 않는
것도 아니라[非無]는 것이 소위 비유비무(非有非無) 중도(中道)이다.
여기서 존재하지 않는 것도 아니라[非無]는 것은 존재하되 실체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연기적으로 형성된[pratityasamutpanna] 현
상으로서, 관습적인 의미에서, 이름[假名, prajnapti]과 언어[言說,
vya- vahara]로서 존재한다는 의미이고 이것이 곧 두 가지 진리 중
의 세속적 차원의 진리[世諦, samvrti-satya]를 가리킨다. 그러나
사물은 그 자체의 본성[自性, svabhava]을 가진 실체로서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非有] 이것이 사물의 공성[空性, sunyata]이며, 제일의
제(勝義諦), 혹은 궁극적 차원의 진리[眞諦第一義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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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키피디아도 검색된다.

***
 여러 인() () 의해 생겨나는 것이 (존재)이다.
 나는 이것을 공하다() 말한다.
 그리고 또한 가명(假名)이라고도 말하며,
 중도(中道) 이치라고도 말한다.
 단 하나의 법(존재) 인과 연을 따라 생겨나지 않은 것이 없다.
 그러므로 일체의 모든 법이 공하지 않은 것이 없다.

여러 인() () 의해 생겨나는 것인 (존재) 공하다() 나는 말한다 이렇게 말하는가여러 인과 연이  갖추어져서 화합하면 비로소 사물이 생겨난다따라서 사물은 인과 연에 귀속되는 것이므로 사물 자체에는 고정된 성품(自性 · 자성)이 없기 때문이다. 고정된 성품(自性 · 자성)이 없으므로 공()하다그런데  공함도 또한 다시 공한데, (이렇게 공함도 다시 공하다고 말할  있는 이유는사물이 공하다고 말한 것은단지 중생을 인도하기 위해서 가명(假名)으로 (공하다고말한 것이기 때문이다. (사물이 공하다고 말하는 방편과 공함도 공하다고 말하는 방편에 의해) "있음()" "없음()"  극단(二邊) 벗어나기에 중도(中道) 이름한다.
***

불교 사상은 존재론인식론지식론언어철학심리철학마음의 철학 등이 망라된 인간 존재론이라고   있을지 모른다.

인간의 존재가 무엇인지를 규명하기 위해우리 의식이 궁구할  있는 극한을 사유한 그런 내용일 것이다.

하지만 이때  사람들이요즘 우리가 쉽게 알고 있는 물리학이나유전학 ,심리학,  뇌과학 등에 대한 지식이 있었더라면 그들이 알고 있는 바를 (요즘 사람들이 쉽게 이해할  있게표현할  있었을지도 모르고아니면 그들의 주장 내용의 일부를 수정했을 지도 모르겠다.

분명 이들에게는 이런 지식들이 제공하는 관찰들이 결여되었기 때문에 사유가 오도된 측면도 있었을 것이다.

예를 들어 입체를 입자로 환원할  있다는 현재의 입자론원자론을 알았더라면 존재가 소립자들의 무궁한 운동이라고 말했을지도 모른다.

느티나무는  씨앗 속에 이미 있었다는 말도 유전학을 알고 있었더라면 진부하다고 생각해서  했을지도 모른다.

가시광선이나가청주파수나 이런 용어를 알았더라면 오온을 보다  쉽게 설명했을 지도 모른다.

그렇지만그런 유형의 지식이 결여된 상태에서 순수하게 의식과 몸과 자신을 둘러싼 외계를 끝까지 궁구해 오직 순수한 사유로만 이루어낸 불교 사상에 어떤 진실이 있다고 믿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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