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지프스의 신화>라고 오래 전에 흰색 표지의 100여 페이지로 된 문고본으로 읽은 기억이 난다. 문고본이란 좋은 것인데 가격도 싸고 휴대도 간편하기 때문이다.
출판사 입장에서는 돈이 되지 않아서인지 요즘은 문고본이 잘 나오지 않는 것 같다.
<시지프 신화>라고 새로 출간된 책은 해제와 작가 연보가 붙여져 250여 페이지의 분량으로 되어 있다.
알베르 카뮈
출판
책세상
발매
1997.04.10
이 책을 읽으면 마치 중국 요리를 호텔에서 코스로 먹는 것과 같은 느낌인데, 그것은 아포리즘의 연속이라 할 만큼 미문들의 연속이기 때문이다. 물론 정확한 비유는 프렌치 코스 요리이겠지만 프렌치 요리 따위는 먹어 본적이 없으니 중국요리로 비유를 대신 하고자 한다.
노벨 수상작가가 쓴 글이니 오죽 하겠는가? 하지만 맨날 라면만 먹는 나 같은 사람의 입장에서는 어쩌다 (미국에 가서) 찰스 주니어 햄버거를 먹는 편이 더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이 책에서 저자가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 지 잘 모른다. 이런 책은 줄을 그어가며 정독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역자의 해제를 참고하면 부조리한 세상을 자살하거나 헛된 희망으로 살아낼 것이 아니라 명철한 정신으로 관조하며 견뎌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자 하는 것도 같다.
만약 그런게 사실이라면 그런 내용이다라고 저자가 애초에 요약문을 권두에 써 놓는 편이 좋았을 것이다. 만약 말하고 싶은 것을 10줄 이내로 요약할 수 없다면 10권을 쓰더라도 전달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발간되는 모든 책에는 반드시 저자가 직접 요약문을 써서 권두에 붙여놓아야 한다는 법이 만들어져야 할 것 같다. 이 법에 따르면 요약문과 내용이 일치하지 않는 책의 저자와 출판사가 연대해 형사적인 책임을 지도록 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독자들은 책의 내용을 모두 읽어보는 수고가 없더라도 이 요약문만 보면 책이 어떤 내용인지 판단할 수 있는 공익적 효과를 기할 수 있을 것이다. 요즘이야 텔레비전 게임 비디오 인터넷 등으로 다른 인간의 생명의 일부 즉 생존 가능 시간을 빼앗아 가는 일이 너무 흔하지만, 예전이라면 책을 읽으며 낭비한 인생들도 꽤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각설하면, 이 책은 젊은 영혼이라면 반드시 (요약문 이라도) 읽어야 할 아주 좋은 책이다. 한국이나 일본에 자살률이 높은 것은 이 사회에서 삶이 힘들다는 근본적 이유를 제쳐 놓는다면, 이런 책을 잘 안 읽기 때문일 것이다.
책의 저자에게 표할 수 있는 최상의 경의는 그 책의 내용의 일부를 타이핑 해 보는 것이다. 관심이 있다는 뜻이기도 하고, 그 책을 위해 충분한 수고를 감내하였다는 표시이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사랑하는 사람을 위한 희생 같은 것이다.
***
오, 나의 영혼아,
불멸의 삶을 애써 바라지 말고 가능의 영역을
남김없이 다 살려고 노력하라.
참으로 진지한 철학적 문제는 하나뿐이다. 그것은 바로 자살이다. 인생이 살만한 가치가 있느냐 없느냐를 판단하는 것이야말로 철학의 근본문제 답하는 것이다. 그 밖에 세계가 3차원으로 되어 있는가 어떤가, 이성의 범주가 아홉 가지인가 열두 가지인가 하는 문제는 그 다음 일이다. 그런 것은 장난이다.
어떤 질문이 다른 질문보다 더 절박하다고 할 때 그것을 판단할 수 있는 기준은 무엇일까 하는 의문이 생기게 되는데, 나는 그 질문에 대답한 사람이 마땅히 실천으로 옮겨 보여주어야 할 행동이야말로 바로 그 판단의 기준이라고 말하고 싶다.
반면에 인생이 살만한 가치가 없다고 생각한 나머지 죽는 사람들도 많다. 그런가 하면 역설적이게도 자신에게 살아갈 이유를 부여해주는 이념 혹은 환상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사람들도 있다. (이른바 살아갈 이유라는 것은 동시에 목숨을 버릴 훌륭한 이유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자살이라는 행위는 마치 위대한 작품이 만들어질 때처럼 마음속이 고요해진 가운데 준비되는 것이다. 당사자 자신도 그렇게 될 줄을 알지 못하고 있다. 그러다가 어느 날 밤 문득 방아쇠를 당기거나 물속으로 몸을 던지는 것이다. 어느 날 밤, 부동산 관리소장이 스스로 목숨을 끊어버리자 사람들은 내게 말하기를 그가 5년전 딸을 잃은 다음부터는 사람이 많이 변했고, 그야말로 그일 때문에 골병이 들었다고 했다.
이와 같은 설명은 그럴듯해 보인다 그러나 바로 그날, 절망에 빠진 사람의 친구 하나가 그에게 무관심한 어조로 대꾸한 적은 없는지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바로 그자가 죄인이다. 왜냐하면 그것 한 가지만으로 유예 상태에 있는 모든 원한과 모든 권태가 한꺼번에 밀어닥치기에 충분하기 때문이다.
자살은 어떤 의미에서 그리고 멜로드라마에서처럼 하나의 고백이다. 그것은 삶을 감당한 길이 없음을, 혹은 삶을 이해할 수 없음을 고백하는 것이다.
고의적으로 죽음을 택한다는 것은 이와 같이 습관의 가소로운 면, 살아야 할 심각한 이유의 결여, 법석을 떨어가며 살아가야 하는 일상의 어처구니 없는 성격, 그리고 고통의 무용성을 본능적으로나마 인정했음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한 인간이 자신의 살에 대해 가지는 애착에는 이 세상의 모든 비참보다도 더 강한 그 무엇이 있다. 육체가 내리는 판단도 정신이 내리는 판단 못지않은 가치가 있는 것이다.
삶에 대한 이런 모욕, 삶을 수렁에 빠뜨리는 이 부정은 과연 삶의 무의미에서 유래하는 것일 까? 삶의 부조리는 과연 희망이라든가 자살 같은 길을 통해서 삶으로부터 벗어나기를 요구하는 것일까?
참다운 노력이란 포기하는 쪽이 아니라 오히려 가능한 한 그곳에 살아 남아 버티면서 멀고 구석진 고장에 서식하는 괴이한 식물들을 가까이서 관찰하는 일이다. 집요함과 통찰이야말로 부조리와 희망과 죽음이 서로 대화를 주고받는 비인간적인 유희를 구경하는 관객의 특권적 자질이다. 그럴 때에야 비로서 정신은 기본적인 동시에 미묘한 그 춤의 갖가지 모습들을 밝혀내고 또 스스로 체험적으로 살기에 앞서 그것들을 분석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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