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을만한 기록에 따르면 임진왜란 당시 조선 수군의 승리의 주된 이유는 다음 3가지라고 한다.
* 일본 군선보다 튼튼하고 선고가 높으며 기동성이 좋은 조선의 군선 (판옥선)
* 일본의 조총보다 파괴력이 크고 사정거리가 긴 조선의 화포
* 지리 - 섬이 많고 해안선이 복잡한 한반도 서남해안
* 일본의 조총보다 파괴력이 크고 사정거리가 긴 조선의 화포
* 지리 - 섬이 많고 해안선이 복잡한 한반도 서남해안
그래서 임진왜란 때 해전은 대부분 근접전이 아니고 조금 떨어진 거리에서 화포나 화살을 이용한 싸움이었고, 튼튼한 선체를 이용한 충파 (배로 부딪힘) 싸움이었고, 그러한 싸움을 가능 하도록 한 복잡한 해안선을 지닌 한반도의 지리를 십분 이용한 싸움이었다.
결국 주된 승리의 이유는 해전에 있어서 만큼은 군사 기술 면에서 조선이 일본 보다 앞서 있었던 것 때문이라고 할 수 있고, 한반도의 서남 해안이라는 특수한 지형에서 싸웠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비유컨대, (체력은 좀 약하지만) 팔이 긴 아웃복서가 (체력은 강한) 인파이터를 홈경기의 이점을 활용해 이긴 싸움라 말할 만 하다.
만약 한반도 서남해안이 아니고 동해나 동중국해 앞바다처럼 밋밋한 해안선을 가진 지형에서, 쌍방이 동일한 무기를 사용해 싸웠다면 당연이 일본 수군에 조선 수군은 중과부적 질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물론 이런 조건에서도 이순신은 이기고 원균은 졌으니, 이것들이 승리를 결정한 요인의 전부는 아니다. 이순신의 천재적인 전략이나 용병술이 있었기 때문임은 말할 필요도 없다.
명량해전의 경우 위의 모든 조건들이 잘 결합된 싸움이었고, 그래서 이순신이 탄 대장선의 경우 2명의 사망자와 3명의 부상자가 있었을 뿐이라고 알려져 있다. 휘하 장수 <안위>의 배를 제외하고는 백병전도 없었다고 한다.
최근 1500만 관객을 돌파한 명량 회오리의 바람은 그래서 아는 사람이 볼 때는 다소 어설픈 스토리라고 할 수 있다.
화약을 가득 실은 자폭선이 나온다든가, 대규모 백병전으로 싸운다던가, 바다 소용돌이에 빠진 대장선을 몇 척의 어선으로 끌어낸다던가 하는 것들은 사실과는 다른 꾸민 이야기들이다.
임진왜란의 기록들을 모르는 사람들이라면 모르지만 아는 사람들에게는 리얼리티들 떨어뜨려 영화에 몰입하지 못하도록 만드는 이야기 들이다.
역사소설이나 팩션이니까 극의 흥미를 위해 이런 꾸밈이 있는 것도 당연하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식자우환이라고 아는 사람에게는 공감하기 어렵다. 모르면 행복하고 알면 알수록 슬픈 세상인가?
영화로 보아도 명량은 스토리는 엉성하고, 영화 미학이라 할만 것도 없으며, 연기가 탁월한 것도 아니고, 긴장감도 없고, 교훈도 없고, 음악도 시끄럽고, 연기자의 일본어도 어색하고 모든 면에서 보통 이하의 영화라 본다.
하지만 이런 영화를 1500만 관객이 보았으니 <대한민국 최고 영웅 이순신을 이용한 애국 마케팅>이란 것을 제외한다면 그 이유는 무엇일까?
소위 해석학에서는 선이해라는 것이 있다.
네이버에 따르면 이 용어는 신성할 정도로 어려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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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구조'에 따라 텍스트 전체의 '의미의 예취'(Antizipation des Sinnes)를 '선이해'라고 명명했다. 가다머에 의하면 첫째로, 선이해란 텍스트 해석의 초동작업으로서 텍스트 전체의 의미를 선행적으로 기투하는 것인바, 그 선이해로부터 텍스트의 "통일적인 의미로서 성취될 수 있는 것"이 규정된다. 둘째로, 선이해는 그것이 해석자 내에 있는 것이긴 하지만 해석자의 주관성으로 귀착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전승과 해석자와의 관계 속에서 끊임없이 형성된다. 그런 의미에서 선이해는 역사적인 구조계기를 지닌다.
왜냐하면 텍스트의 의미에 대한 선이해는 그 텍스트가 전승으로서 해석자에게 구전되고 있는 까닭에 그 전승의 해석과 재해석을 매개로 미리 형성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해석자가 새롭게 전승을 텍스트로서 해석할 때의 초동작업으로 되기 때문이다. 셋째로, 선이해는 그것이 해석자에게 있어 미리 형성되어 있는 까닭에, 해석자의 의식을 점유하고 있는 다양한 '선판단'(Vorurteil)으로서 초동작업을 행한다. 다만 텍스트에 대한 선판단이 텍스트의 참된 이해는 아니기 때문에, 선판단을 중단하고 해석자 스스로의 의미에 대한 예취를 물음에 붙여야만 하지만, 선판단은 언제나 이미 시동하고 있기 때문에 해석자는 그 자신의 선판단을 걸고서 텍스트에 대한 해석 과정에 들어갈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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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사실 이것은 <아는 만큼 보인다>는 문장을 어렵게 꼬아서 말해놓은 것에 불과하다. 모든 새로운 것을 이해할 때 사람은 기존에 자신이 가지고 있는 이해의 지평(선이해)를 통해서 이해하게 되므로, 결국 같은 것을 보아도 기존에 무엇을 알고 있었느냐에 따라 이해되는 것은 다르다는 말이다.
그래서 명량 회오리의 바람이 재미가 없다는 나 같은 사람도 있고, 재미있다는 다른 1000만 명도 있는 것이다. (어느 쪽이더 똑똑하다거나 우월하다거나 그런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나는 단지 명량이란 영화가 내게는 재미없었다는 말을 하고 싶었을 뿐이다.
김민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