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4월 10일 목요일

소녀시대와 자유로부터의 도피





에리히 셀리그만 프롬(Erich Seligmann Fromm, 1900년 - 1980년)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유태인 독일계 사회심리학자이면서 정신분석학자, 인문주의 철학자이다. 비판이론 영역의 프랑크푸르트 학파에서 활동하였다고 한다
<사랑의 기술>, <소유냐 존재냐>, <자유로부터의 도피> 같은 알려진 책을 썼다.

<자유로부터의 도피> 인간과 자유의 문제를 다룬다. 책에 따르면 근대인은 개인적인 자유를 얻게 되면서 동요, 무력감, 회의, 고독, 불안을 함께 떠안게 되었다고 한다. 논지는 이렇다.

근대에 와서 자유는 인간에게 독립과 합리성을 부여하는 한편, 고립시킴으로써 그를 불안에 싸인 무력한 존재로 만든다. 이러한 고립은 견디기 어렵다. 따라서 근대인은 자유라는 무거운 짐으로부터 도피하여 새로운 의존과 복종의 대상을 찾느냐, 아니면 인간의 독자성과 개성에서 나오는 적극적인 자유의 실현을 위해 앞으로 나아가느냐 하는 갈림길에 서게 된다.

프롬은 파시즘과 같은 정치 사상에 인간이 매몰되는 것을 예로 들어 설명을 했지만, 그가 주장한 내용은 소녀시대를 위시한 많은 아이돌 그룹이나 다양한 종류의 게임에 빠져있는 오늘날의 현대인에게도 여지없이 적용된다고 하겠다.

결국 소녀시대의 노래에 열광하면서 인터넷 게임에 열중하면서 감당 못하는 자유로부터 도피해서 우리는 자아를 망실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자유로부터의 도피> 원문의 군데를 인용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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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나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면, 누가 나를 위해 존재할까?
내가 나만을 위해 존재한다면, 나는 도대체 무엇일까?
지금이 아니라면 언제일까?
<탈무드 미슈나 아보트>

우리는 너희를 천상의 것도 지상의 것도 아닌, 죽을 운명의 것도 불사의 것도 아닌 존재로 창조했다. 그것은 너희가 자신의 의지와 명예에 따라 자유롭게 자신을 창조하고 형성할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우리는 너희에게만 자신의 자유의지에 따라 성장하고 발전할 있는 기회를 주었다. 너희는 자신 속에 보편적 생명의 싹을 지니고 있다.
피코 델라 미란돌라 <인간의 존엄성에 대하여>

개인에게 안전을 주었던 원초적 유대가 일단 끊어지면, 그리고 개인이 완전히 독립된 존재로서 외부 세계와 직면하면, 그는 참을 수없이 무력하고 고독한 상태를 극복해야 하기 때문에 그에게는 가지 길이 열려있다.

<자동인형적 순응> 유별난 메커니즘은 근대 사회에서 정상인 대다수가 발견하는 해결책이다. 간단히 말하면, 개인은 자기 자신이기를 그만둔다. 그리고 문화적 유형이 그에게 제시한 성격을 그대로 수용한다. 따라서 그는 모든 타인과 똑같아지고, 타인이 그에게 기대하는 모습과 똑같아진다. 나와 외부 세계의 차이는 사라지고, 그와 더불어 외로움과 무력함을 두려워하는 의식도 사라진다. 메커니즘은 일부 동물들에게서 있는 보호색에 견줄 있다. 이런 동물들은 주위 환경과 너무 비슷해 보여 거의 구별할 없다. 자신의 개별적 자아를 포기하고 자동인형이 되는 사람은 주위의 수백만 명의 다른 자동인형과 똑같기 때문에 이상 고독과 불안을 느낄 필요가 없다. 하지만 그가 치르는 대가는 비싸다. 그것은 자아의 상실이다.

삶을 살지 못하기 때문에 삶이 의미를 잃으며, 인간은 절망에 빠진다. 사람은 육체적 굶주림 때문에도 조용히 죽지 않고, 정신적 굶주림 때문에도 조용히 죽지 않는다. 우리가 정상작인 사람이 관련된 경제적 욕구만 보고 자동인형이 보통사람의 무의식적인 고통을 보지 않으면, 우리의 문화는 인간적 토대부터 위협하는 위험을 없다. 지도자가 흥분을 약속하고 개인의 삶에 의미를 준다는 정치적 기구와 상징을 제시하기만 하면, 어떤 이념이나 지도자도 기꺼이 받아들이는 , 그것이 바로 우리 문화를 토대부터 위협하는 위험이다. 자동인형 같은 인간의 절망은 파시즘의 정치적 목적을 키우기 좋은 비옥한 토양이다.

근대인은 자신이 좋아 보이는 대로 행동하고 생각하는 것을 방해하는 외적인 속박으로부터 자유로워졌다. 그는 자기가 무엇을 원하고 생각하고 느끼는지 알았다면, 자신의 의지에 따라 자유롭게 행동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그것을 알지 못한다. 그는 익명의 권위에 순응하고 자신의 자아가 아닌 자아를 받아들인다. 그가 그럴수록 무력감은 더욱 심해지고, 그는 더욱 순응할 밖에 없다.

감정 없이 생각하고 감정 없이 생활하는 것이 하나의 이상적인 태도가 되어버렸다. '감정적' 것이 불안정하거나 정신적으로 불균형한 것과 같은 뜻이 되어버렸다. 기준을 받아들였기 때문에 개인은 매우 약해졌다. 그의 생각은 빈곤해지고 단조로워졌다. 한편 감정은 완전히 죽일 없기 때문에 인격의 지적인 측면과 완전히 동떨어진 곳에 존재해야 한다. 결과는 값싸고 가식적인 감상성인데, 감상성을 가지고 영화와 대중가요는 감정에 굶주린 수백만 명의 소비자를 만족시키는 것이다.

개인이 자발적인 활동으로 자아를 실현하고 그리하여 자신을 세계와 관련시키면, 그는 고립된 원자 상태에서 벗어난다. 그는 세계와 구조화된 전체의 일부가 된다. 그는 자신에게 맞는 자리를 갖고, 자기 자신과 삶에 대한 회의는 사라진다. 이러한 의심은 그가 따로 분리되어 있고 삶이 좌절 당한 데에서 생겨난 것이지만, 강박적으로나 자동적으로 살지 않고 자발적으로 있을 의심은 없어진다. 그는 자신을 적극적이고 창조적인 개인으로 인식하고 삶의 의미는 하나뿐 산다는 행위 자체 뿐이리라는 것을 인식한다.

우리는 긍정적인 대답이 있다고 믿는다. 자유가 성장하는 과정은 악순환을 이루지 않고, 인간으로 자유로우면서도 외롭지 않을 있고, 비판적이지만 의심으로 가득 차지 않을 있고, 독립적이지만 인류를 구성하는 없어서는 안될 일부일 수도 있다고 믿는다. 인간은 자신의 자아를 실현하고 자기 자신이 됨으로써 적극적인 자유를 얻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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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물에 빠져 인간의 주체적 자각을 잃어간다는 문제의식은 동양철학의 일관된 주제 중의 하나였다. 에리히 프롬의 저작은 문제를 설득력 있게 논파하고 있다.

소녀시대의 노래를 들으며 빠져들기 보다, 조용한 나무 그늘 아래 앉아 캔맥주라도 마시면서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고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돌아보는 것은 어떨까?

이때 맥주는 독일 맥주여야 함은 물론이다. 국산맥주라면 자유에 대해 알기 전에 숙취나 속쓰림을 먼저 경험할지도 모를 일이다.

바롬 이름과 미래 (baromnf.com)
김민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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