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는 부에로스아이레스에서 태어나 《픽션들》(Ficciones), 1944년, 《알렙》(El
Aleph), 1949년과 같은 단편소설 작품집을 남긴 위대한 소설가이다.
나는 보르헤스를 좋아하는데 그것은 (기형도 시인이 쓴 것처럼) 오징어가 질겨서 오래 씹을 수 있으니까 좋아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그의 소설은 대개 한번 보면 무슨 말이지 잘 알 수 없는데, 여러 번 본다고 무슨 말인지 꼭 알게 되는 것도 아니지만, 실제로는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읽는다는 행위를 하는 것처럼 느끼고 싶을 때 읽으면 좋은 책이다.
최근에 알레프를 다시 읽으면서, 보르헤스가 1940년대에 이미 인터넷과 가상현실기기를 생각해 낸 예언가란 점을 알고 놀랐다.
'나는 서재에 있는 사람을 상상하고 있어. 꼭
거대한 어느 도시의 망루와도 같은 서재, 전화기와 전보기, 축음기, 무전통신기, 영상 스크린 환등기 용어사전, 달력 예정표, 회보 등을 갖춘 서재에 있는 사람 말이야...."
그는 그렇게 모든
장비를 구비한 사람에게 여행이란 행위는 불필요하다는 의견을 밝혔다
어떤가, 인터넷에 연결된 컴퓨터와 큼직한 모니터와 키보드를 갖추고 위에 열거한 모든 기능들을 할 수 있는 우리들을 말하고 있는 것 같지 않은가?
나는 이런 사람에게 여행이 불필요하다는 의견에 동의한다. 사실이지 나도 일찌기 미국, 중국, 일본, 캐나다의 광할한 땅들을 기차, 버스, 렌터카, 심지어는 배를 타고 수십일 씩 돌아보았지만, 그때 창 밖으로 지나쳐 보았던 모든 광경들은 희미한 기억 속으로 사라져가고 있다. 차라리 여행지에 관련된 고화질 영상을 컴퓨터 모니터로 한번 보는 편이 더 나을 성 싶다.
어쨋거나 본론으로 돌아와 (뭐 특별히 주장하고 싶은 것도 없지만) 알레프는 말하자면 가상 현실 기기 같은 거라고 생각하면 이해가 빠르다.
"알레프라고요?" 나는 그의 말을 되풀이 했다. "그래. 모든 각도에서 본 지구의 모든 지점들이 뒤 섞히지 않고 있는 곳이야".
그것은 지하실 한쪽
구석에 '알레프'가 있기 때문이었다.
그는 알레프란 모든
지점들을 포함하는 공간 속의 한 지점이라고 설명했다.
층계의 아래쪽 오른편에서 나는 거의 견디기 어려운 광채를 지닌 무지갯빛의 작은 구체를 하나 보았다. 처음에 나는 그것이 빙빙
돌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잠시 후 나는 그런 움직임이 그
구체 속에 담긴 현기증 날 정도의 광경들 때문에 생겨난
환영들이라는 것을 알았다. 알레프의 직경은 2-3센티미터 정도
되는 것 같았지만 우주의 공간은 전혀 축소되지 않은 채 그 안에 들어 있었다. 각각의 사물은 무한히 많은 사물들 이었다.
어떤가? 알레프란 결국 직경2-3센티 정도의 광학기기인 것이다. 이 대목에서 나는 오큘러스 리프트를 생각하게 되었다.
오큘러스 리프트는 HMD(Head mounted Display) 즉 안경처럼 머리에 쓰고 대형 영상을 즐길 수 있는 영상표시장치다. VR(virtaul reality)를 시각적으로 구현할 수 있는 도구인데, 이것을 개발하는 회사가 오큐러스 VR, 그 개발자가 팔머 럭키, 존 카멕, 밸브… 등등의 사람이라는데 존카멕의 이름에 이르러서는 게임 좀 한다는 사람은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이디 소프트를 설립해 울펜슈타인, 듐, 퀘이크 같은 게임을 개발한 사람이라는데…. 어쨋거나 돈에 눈먼 보통사람들에게는 페이스북이 오큘러스
VR을 23억 달러(2조 5천억원)에 인수했다는 뉴스로 큰 감동을 준 그런 기기이다.
알레프의 앞머리에는 다음과 같은 인용문이 있다.
오 하느님, 난 호두알
속에 갇혀 있다해도, 나 자신을 무한 공간의 왕이라 생각할 수 있다네.
-[햄릿] 2막 2장
내게는 마치 리니지에 빠진 성주의 대사처럼 느껴진다.
자, 다소 뜬금없이 이제 의상대사의 법성게를 인용하는 것으로 마무리를 하겠다. 왜냐하면 이 블로그는 성명학 관련 블로그이자 동양철학자(그게 아니라면 그 애호가)의 블로그이기 때문이다.
법성게(法性偈)는 의상대사義湘大師)가 670년 7월 중국 지상사(至相寺)에서 화엄사상의 요지(要旨)를 담은 십승장(十乘章) 10권을 엮고서 그 내용을 축약한 것이라 한다. 전체 7언(言) 30구(句) 210자(字)의 간결한 시구(詩句)로 이루어져 있으며 법성게로 이루어진 화엄일승법계도(華嚴一乘法界圖)는
중앙의 법(法)자로 시작해서 다시 중앙에서 불(佛)자로 끝을 맺고 있다.
법성원융무이상 (法性圓融無二相) 법성은 원융하여 두 가지 모습이 없고
제법부동본래적 (諸法不動本來寂) 모든 법은 부동하여 본래부터 고요하네.
중략..
일중일체다중일 (一中一切多中一) 하나 속에 전체, 전체 속에 하나가 있으니
일즉일체다즉일 (一卽一切多卽一) 하나가 전체요, 전체가 곧 하나일세.
일미진중함시방 (一微塵中含十方) 한 티끌 가운데에 시방세계가 담겨있고
일체진중역여시 (一切塵中亦如是) 일체의 모든 티끌들도 또한 이와 같음이라.
무량원겁즉일념 (無量遠劫卽一念) 무량한 세월이 곧 찰라의 한 생각이고
일념즉시무량겁 (一念卽是無量劫) 찰라의 한 생각이 곧 무량한 세월이라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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